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스티니아노스 2세 (문단 편집) ==== 교황의 마지막 콘스탄티노폴리스 방문 ==== 709년 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테오도루스에게 함대를 맡겨 라벤나로 파견해 사사건건 제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제압하게 했다. 라벤나에 도착한 테오도로스는 황제의 이름으로 연회를 열어 모든 고관들을 초청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고관들은 아무 의심 없이 약속된 날짜에 연회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나 펠릭스 대주교만이 실명형에 처해진 후 폰투스에 유배되었다가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처형된 뒤에야 자기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테오도로스의 병사들은 라벤나를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라벤나 시민들은 당연히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라벤나 총독부는 수년간 마비되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 [[콘스탄티노]]는 이런 상황에서도 퀴니섹스툼 공의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710년에 출발한 교황은 711년 초봄에 도착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와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황제인 티베리오스의 성대한 영접을 받았다. 교황 일행은 금으로 된 마구를 달고 화려한 옷을 입힌 말을 타고 금문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도에 입성하여 플라키디아 궁전으로 행진했다. 당시 니케아에 있었던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환영의 서신을 보내 니코메디아로 가는 길의 중간 지점에서 마나자고 제안했다. 교황은 선뜻 동의했고, 이틀 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광경이 연출되었다. 수많은 이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정복을 입고 제관을 쓴 차림으로 바닥에 엎드려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춘 것이다! 이후 황제는 일요일에 교황이 주재한 성찬식에 참석하여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빌었고, 교황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서 회의를 시작했다. 교황은 퀴니섹스툼 공의회의 교회법 중 약 절반 가량을 승인했고, 황제는 나머지 조항들을 폐기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작별했고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교회의 모든 특권을 부활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교황은 로마를 출발한 지 1년 만인 711년 10월에 로마에 도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